산 정상에 일찍 오르면 남보다 일찍 내려온다는 말이 있듯이
40대 중반에 대기업의 임원이 되었고, 4 년 후 사장의 전화 한 통화로 직장을 그만 두어야만 했다.
50살도 되기전 실업자가 되었다.
너무나 열심히 했기에 현실을 받아 드리기엔 마음이 많이 아팠다.
오로지 직장밖에 몰랐고 가정은 뒷전이었기에 가족과 친지 그리고 동료와 부하 직원에게도 볼 면목이 없었다.
그래서 실업급여를 받을 때만 외출을 했고 집에서 긴 은둔 생활을 했다.
처가 쪽에 남자가 없어 장인,장모님과 함께 경북 성주에서 전원주택 생활을 하고 있었다
처형이 서울에서 사업을 실패하고 내려와 함께 살게 되었고,
식용 개 사육을 하자고 하기에 동참을 하기로 했다
자그마한 산을 형질 변경하여 집을 짓었기 때문에 공간이 많아 도사견 10마리로 시작을 했다.
아침, 저녁 꼭 2번씩 식사를 주었고 집사람이 직접 예방 접종도 하였고
이마트에 찾아가 닭 처리물을 갖고와 먹이기도 했다.
개는 많게는 10마리 정도 새끼를 낳는다. 진통이 시작될 때면 집사람이 옆에 기다리다 탯줄을 끊어 주었고
밤을 세워가며 새끼를 받기도 했다. 근무했던 공장에서 매일 집사람이 1톤 트럭을 몰고 잔 밥을 가져와
여름에도 따뜻하게 데워 식사를 제공했다.
한 마리도 죽지 않고 무럭무럭 잘 자라 주었다. 금방 자라다 보니 개를 팔지 않을 수 없었다.
개들은 개장수를 잘 안다.
모르는 사람들의 인기척이 나면 다들 소리 내어 짓지만 개장수가 오면
다들 숨을 죽인다. 가지 않으려 몸부림치는 개를 내 품에 앉고 철창 속으로 넣었다.
개의 눈빛을 보았다. 원망의 눈빛이 아닌 헤어짐을 안타까워하는 그 눈빛...
그 순간 나는 속으로 한없이 울었고 그날 집사람과 이 일을 하지 말자고 했고
일없는 일과가 또 이어졌다.
그러던 중 함께 근무했던 부하 직원 한 사람이 보험을 할 것을 권유했고
난 국내외 모든 생명보험을 철저히 검토한 후 가장 혜택이 좋은 외국 계 보험회사 대리점을 개업했다.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었다. 어떤 분들은 "이사님 제 차례는 언제입니까" 하고 전화도 했다.
첨 개업을 한 날이 10월15일 이었고 단지 한달 보름 만에 그해 전국 수천개 대리점 중 3위를 했다.
이태리와 파리 무료 티켓 2장이 나왔고 신혼 여행이후 첨으로 집사람이랑 비행기도 탔다.
이태리 트래비 분수에서 다시 돌아오리라 동전을 물에 던졌지만 아직 다시 가진 못했다.
그러다 나를 믿고 가입해 주신 많은 분들을 위해 겸직 할 수 있는 직업을 찾던 중
공인중개사를 알게 되었고 독학 공부를 시작했다.
다행히 10여 개월 노력 끝에 합격을 했고,
2004년 10월 이곡 역 평화타운 상가에서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개설했다.
사무실에 숙식을 할 수 있는 시설이 있어 2009년7월 그만둘 때 까지 집에서 잔 적이 거의 없었다.
지하철 부근이라 출근 전에 문을 열었고 저녁 늦게까지 불을 밝혔다.
계약에 관계없이 많은 분들이 상담을 요청했고 때론 반나절 상담한 적도 부지기수였다
직장에서 23년 동안 인사 업무만 해왔기 때문에 오로지 진실 하나만은 몸에 베여 있었고
가식 없는 그런 모습에 주위 부동산 보다 훨씬 많은 고객들이 찾아왔다.
진실 하나만으로는 이겨내기는 너무나 힘이 들었다.
많은 고객들이 자기 물건을 과대 포장하기도 했고,
꼭 물건을 보러 오겠노라는 말에 휴일 아침 일찍 문을 열고 밤 10까지 기다린 적도 많았다.
급기야 신경성 위염이 왔고 2009년 7월 문을 닫았다.
또다시 백수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은둔 생활은 마음을 병들게 했고 급기야 마음의 병이 육체의 병으로 이어졌다
수차례 큰 병원에도 가보았지만 원인도 찾을 수 없었고 우울증과 화병을 이기기 위한 한약까지 복용해야만 했다.
종일 집에만 있으니 집사람과의 관계도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돈에 관계없이 일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인터넷 검색을 통해
대구 다사 부근 자그마한 아파트에 경비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바로 이력서를 작성하여 집사람이랑 아파트 관리실로 갔다
격일 근무에 월 85만원
근무 하겠다고 하고 집으로 오는 도중 집 부근 공장 정문에 “생산직 구함”이란 전단지를 보고 함께 들어갔다.
일당 남자 5만원, 여자 4만원의 일용직...
둘 다 내일부터 출근하라고 했고 우린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아파트에서 전화가 왔다 내일부터 출근하라고...
죄송하다고 했고 다음날 섬유회사로 출근을 했고 모처럼의 규칙적인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침 일찍 운동 삼아 함께 걸어서 출근을 했고 서로 도와가며 일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위에게서 급한 전화가 왔다.
딸애가 양수가 터져 병원으로 갔다고...
외손자가 태여 났다 그 순간 굳은 결심을 했다. 나의 이런 모습을 손자에게 보여줄 수 없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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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관에서 자란 외손자가 이젠 많이 자랐다.
면담한 아파트 소장이 생각났다. 그래서 일을 하면서 독학으로 주택관리사 공부를 시작했다.
일용직 일이 겨울에만 하는 섬유 관계 일이라 3개월 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했다.
공부는 요령이기에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머리 좋은 사람도 노력하는 사람을 당할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도
즐겁게 일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즐겁게 공부를 했다.
그해 주택관리사 1,2차 시험에 합격을 했고 소장으로서 자질을 높이기 위해 소방 안전 관리자 자격증도 획득했다.
2012년 11월 아파트 관리소장 사전교육에 참여했다
200여명의 예비 소장이 참여했고 그중 경북 출신 12명이 있었고 우리들은 한 팀이 되어
장래 진로에 대해 밤을 세워가며 토의도 했다
그중 포항 출신 한사람이 국가의 좋은 교육제도를 설명해 주었다.
자기는 국가 비용으로 취업성공패키지란 과정에 참여했고 본인이 원하는 교육도 받고
매달 일정액의 수당도 받았다고 하면서
자기를 채용하는 기업은 년 900만 원정도 국가로 부터 지원도 받는 고용촉진대상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분은 제일 먼저 소장으로 취업이 되었다.
그런 제도가 있구나 하고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교육이 끝나고 이제 이력서를 내는 일만 남았고
만일 나를 아파트 관리소장으로 채용만 해 준다면 대한민국 최고의
아파트를 만들이라는 생각으로 대구에서 제일 큰 아파트 위탁관리회사에 온라인으로 이력서를 제출하기로 했다.
그런데
60살 이상은 원서도 제출할 수 없었다.
살아오면서 내가 나이가 많다는 것을 첨 느끼는 순간이었고
그때의 좌절감은 회사 퇴직 때 보다 더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 순간 소양교육에서의 포항 동료의 말이 생각났다.
바로 경산 고용센터를 찾아갔고 상담을 시작했다.
그것이 내 인생을 전환시키는 큰 계기가 되었다.
상담 과정에서 직업상담사라는 직종을 첨 알게 되었고
국가의 비용을 전액 지원 받아 교육 훈련을 시작했다.
딱 5개월 만에 직업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지금 이곳에 취업을 했다.
내가 교육 받은 곳에...
난 이곳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상담을 했고 또 하고 있다
시장을 하신 분도 교장, 지점장을 하신 분도 상담을 한 후
국가의 비용을 지원 받아 기술과 지식을 익히고 자격증을 획득하여 자신감을 갖고 원하는 곳에 재취업도 했다.
70살이 넘은 분도 교육에 참여하고 계시고
60살이 훨씬 넘은 분도 어려운 전기 필기도 합격하시고 실기도 합격하셔서
아파트 전기 주임과 그리고 빌딩 전기 주임으로 취업도 하시고 자그마한 전업사를 개업하시기도 하셨다.
나이가 들어 내 머리의 총명함이 사라질 때 까지 난 열심히 이 일을 할 것이다.
삶에 찌달려 자그마한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고 싶을 때
우연히 이곳을 방문하여 상담을 통해 자신감을 얻고 교육 후
취업 했노라면 음료수 하나를 사들고 왔을 때 난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
국가의 너무나 좋은 제도. 그러나 홍보 부족으로 혜택을 많이 보지 못하고 계신다.
모두 우리들의 세금으로 지원하고 있는데도...
우리나라에는 저희와 같이 국가의 위탁을 받아 훈련을 실시하는 기관이 엄청 많다.
자기의 적성과 흥미에 맞는 직종을 찾아 꼭 이런 제도에 참여하여
보다 나은 내일을 모두 누리시라고 이렇게 제안의 글을 드려본다.
저랑 면담을 하고 또 초심을 잃고 다시 오셔서 재충전 하고 가시는 분도 많이 계신다.
사람은 나이에 관계없이 또 보수에 관계없이 일이 있어야 한다.
상담하시는 분들이 당장 살기 어려운데 무슨 교육이라고 말씀도 많이 하신다.
자기는 꼭 기술 교육을 받고 싶은데 부모님들이 알바라도 해서 당장 돈을 벌어오라고 하신다는
말에 제가 직접 부모님을 설득하여 교육 후 좋은 곳에 취업한 청년도 있다.
평생직장은 사라지고 평생 직업으로 전환된 지 오래다.
100세 시대..
미국에서는 자기의 연령에 0.8을 곱한 것이 지금의 나이라고 한 적이 오래전의 일이다.
특정 부문에 기술과 지식 그리고 자격증은 무조건 있어야 오래 오래 일을 할 수가 있다.
당장의 어려움 땜에 현실에 만족하는 길을 찾는다면 참된 미래는 없다.
이 글을 보시는 많은 분들이 가까운 고용센터를 찾거나 훈련기관을 찾아 상담을 통해 취업과 창업의 지름길인
훈련에 참여하여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하길 기대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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