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일제 강점기에 큰 인기를 모은 한국의 신파극이다. 흔히 〈홍도야 우지마라〉로도 불린다.
1936년 임선규가 집필하여 청춘좌가 동양극장에서 초연하였고,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여 동양극장을 대표하는 흥행작이 되었다.
오빠의 학비를 벌기 위해 기생이 된 홍도가 부잣집 아들인 광호를 만나 결혼하게 되지만, 결국 남편에게서 버림을 받고 남편의 약혼녀까지 살해한 뒤 순사가 된 오빠에게 잡혀가게 된다는 줄거리이다. 여주인공 홍도역에는 차홍녀, 홍도의 오빠 철수 역은 황철, 남편 광호 역은 심영이 맡았다.
이 연극은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이때 이서구가 "홍도야 우지마라 오빠가 있다"라는 노랫말을 써서 영화의 부주제곡으로 발표했는데, 이 노래가 대중가요로 큰 인기를 모았다.
이 작품으로 폐결핵 투병 중이던 무명 작가 임선규가 일약 스타 작가로 떠올랐고, 가혹한 운명에 우는 주인공 남매역을 맡은 차홍녀와 황철도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높은 인기를 바탕으로 영화와 TV 드라마로 여러차례 만들어졌다.
'공연을 보러온 기생, 바람둥이, 시골사람 때문에 극장 유리가 모조리 깨졌다. 서대문 마루턱이 막혀 전차가 못다닐 정도였다.'
1936년 7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공연된 동양극장 풍경을 연출한 연출가 박진이 그때 당시의 상황을 술회한 내용이다. 배우겸 무명 작가였던 임선규는 동양극장 연출가 박진에게 원고를 내밀었다.
원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박진은 '내가 싫어하는 신파극이 다 들어 있다.' 며 내팽개쳤다. 동양극장 사장 홍순언이 원고를 보고 공연을 하자며 고집을 부렸다. 연출가 박진은 공연이 성사되자 심술이 났다.그래서 바꾼 제목이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되었다.
이 작품은 동양 극장 공전의 히트작이 되었다. 임선규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광복 전 우리 연극사에서 최다 관객 동원을 기록했던 작품이다. 이 작품은 우리 나라 최초의 연극 전용 상설 극장이었던 동양극장에서 1936년 7월에 전속극단인 <청춘좌>에 의해 초연되었다. '홍도야 우지마라' 라는 제목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는 주로 유랑 극단들이 변조해서 사용하던 명칭이다.
이 작품이 상상 외로 대성공을 거두자 그 후 몇몇 작가들이 나름대로 소재를 달리하여 다시 작품을 써 상연했고 그 때마다 흥행에도 성공을 거두어 30년대 성행했던 신파극의 대명사처럼 부각되었다고 한다.
또한 1950년 말기엔 <홍도야 우지마라>가 영화화되기도 했으며, 1978년 6월에는 TBC-TV 유머 극장에서 방영하여 그 당시를 겪어온 노인들께 감회를 안겨주기도 했다.
<민족의 설움, 서민의 애환>
홍도는 오빠의 학비를 위하여 기생이 되었으나 오빠의 친구인 광호를 사랑하고 결국 결혼하게 된다. 광호는 이미 약혼자가 있는 몸이었으나 홍도를 사랑하여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다. 그러나 그의 약혼자인 혜숙과 동생 봉옥, 그리고 어머니는 홍도를 쫒아낼 궁리만 하고 결국 광호가 유학을 떠나자 누명을 씌워 홍도를 쫒아낸다.
홍도의 오빠인 철수는 홍도의 뒷바라지로 순사가 되어 있고 홍도의 억울한 누명을 분노하며 복수하고자 하지만 홍도의 만류로 광호의 귀국을 기다린다.
광호는 귀국하였으나 홍도의 억울함을 달래기는 커녕 오히려 기회주의적인 나약한 모습으로 혜숙을 선택하고 이에 분노한 홍도는 혜숙을 칼로 찌른다. 뒤늦게 달려온 홍도의 오빠 철수는 절규하며 동생을 살인자로 연행하면서 극은 막을 내린다.
이 연극은 암울한 일제의 통치 속에서 가련한 홍도라는 기생의 처지를 빌어 서민의 애환을 달래고 광호와 혜숙으로 대표되는 신지식인의 기회주의적이고 비열한 모습을 통렬히 질타하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일제 치하의 배금주의를 고발하여 나라 잃은 우리 민족의 슬픔을 달래고, 홍도의 순정을 통하여 우리 민족의 긍지를 심었던 작품이라고 한다.
<주요 인물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광복이전 최대의 히트작품이었던 만큼 풍성한 뒷 이야기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그 당시의 최고배우들이었던 황철, 차홍녀와 극작가 임선규에 대한 것이다.
연극은 보지 않더라도 그의 얼굴만 보면 좋겠다던 황철은 30~40년대를 통틀어 최고의 역량을 과시하던 배우이다. 1911년생으로 충남 청양군수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배우의 길로 들어서 조선 최고의 배우가 되었다. 차홍녀와는 애틋한 사랑을 키웠으나 이루어지지 못하고 이미 유부녀였던 배우 문정복과 맺어진다.
황철과 부부의 연을 맺은 여배우 문정복은 훗날 극작가로, 또는 연출가로도 활약을 했던 양백명의 아내였다. 그녀는 훗날 이만희 감독이 연출했던 영화 '만추' 등에 출연했던 여배우 문정숙의 언니이기도 하고, 현재 탤런트로 활동하고 있는 양택조의 생모이기도 하다.
황철은 해방이후 '낙랑극회' 를 조직, 그 당시의 혼란한 좌우익 대립이란 정국과는 무관한 삶을 살고자 노력하면서 명동의 명치좌에서 '산적', '뇌우' 등의 연극을 공연하고 있었으나 친분이 있던 좌익극작가 함세덕과 연루되어 결국 월북하고 만다.
1915년 경기 여천태생인 차홍녀는 당대 최고의 인기 여배우이다. 17세 때 극단에 입단, 연극을 시작했다. 타고난 기품과 아름다운 심성으로 천사라는 호칭을 들었으며 유랑극단시절 황철을 만나 연인사이가 되고, 무대 위에서도 황철과 더불어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며 둘의 사랑을 돈독하게 한다. 임선규 작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홍도역을 맡아 스타덤에 오르는데, '홍도'라는 이름은 차홍녀의 가운데자에서 따온 것으로 작가 임선규가 집필 당시부터 차홍녀를 염두에 두고 썼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다.
황철을 사랑하면서도 당시 동양극장 총지배인이었던 최독견과 비밀리에 동거생활을 하며 고민하던 차홍녀는 쉴새 없는 공연과 무리한 지방공연으로 인해 인기절정의 나이인 25살에 요절한다.
소년시절부터 문재를 날렸던 임선규(본명:임승복)는 <조선연극사>에 입단하면서 연구생이었던 당대 최고의 영화배우 문예봉(1917~1999, 본명:문정원,북한인민배우)을 만나, 가족들의 반대를 이겨내고 결혼한다. 폐결핵을 앓는 병상 중에 집필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흥행사상 전무후무한 히트를 하면서 조선최고의 인기작가로 부상한다.
이후 <청춘송가>,<정조성>,<유정무정> 등의 작품이 연속 만원을 기록하면서 임선규의 이름만 간판에 나가도 관객이 무조건 몰려올 정도의 인기를 얻는다. 아내 문예봉의 뒤를 이어 월북하였으나 1970년 폐결핵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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